1970년 12월 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모비(Der Warschauer Ghetto-Ehrenmal)에서 비를 맞으며 사죄했다.
[정기종 전 카타르 대사]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자서전적 정치서적 '나의 투쟁'에서 예고했던 대로 소련 침공계획을 실행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이름 붙인 전격전의 선봉부대로 나치 독일군의 전차군단이 선두에 섰다. 이날은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정복하기 위해 니이멘 강을 도하한 129주년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성공으로 8월 말에는 소련 레닌그라드 강변까지 점령해 도시를 고립시켰다.
그러나 러시아의 겨울은 진흙과 추위와의 싸움으로 전략가들의 말처럼 들어가기는 쉬우나 나오기는 어려운 나라였다. 장장 30개월 계속된 레닌그라드 공방전이 시작되고 결국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
독일을 여행하면 성실한 인격과 분명한 업무처리 그리고 청결한 사회분위기에 매료된다.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학문의 전통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여행의 즐거움을 준다. 게르만 민족의 준법정신과 정직성은 국가의 발전과 공동체 운영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19세기 프로이센의 부흥과 통일제국은 인종주의적 제국주의로 발전하고 이에 더하여 인종 우생학을 활용하기까지 하는 실책을 범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을 포함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운터멘쉔'(Untermenschen) 하등인종으로 규정한 유대인과 슬라브인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집단 학살의 기억을 인류사에 남겼다.
소련의 어느 마을을 점령 후 주민들을 창고에 몰아넣고 10살 이상의 사람들만 나와도 좋다고 하고 불을 지른 학살 사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자식을 불 속에 두고 나오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성서 속 예수의 말에서 제목을 가져온 영화 “와서 보라 (Come and See)”에 참혹하게 묘사되었다.
독일인 중에도 양심에 따라 이같은 국가폭력에 저항한 사람들이 있었다. 반나치 저항운동의 기록인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자의 죽음”의 주인공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치 독일군으로 전선에 섰지만 범죄하지 않는다는 기독교 신념으로 실물 대신 모형권총을 차고 있었던 하젤 (Susi Hasel Mundy)은 “천명이 쓰러질지라도(A Thousand shall Fall)”를 기록으로 남겼다.
전후 독일은 전쟁 피해자와 피해국들에 대한 실질적 보상을 비롯해 거국적인 반성을 해왔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게토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후에도 메르켈 총리가 아우슈비츠 홀로코스트 장소를 사죄 방문하는 등으로 계속되어 세계인들에게 독일 지성인의 양심을 알려주었다.
국가가 과오를 시인하고 사죄하는 것은 개인의 경우보다 더 어려운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비로소 진정한 선진국의 기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