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희 편집위원] 기후위기는 이제 더 이상 과학자들의 경고음만이 아니다.
지구 곳곳에서 폭염과 홍수, 산불이 일상화되면서 기후위기는 인류 생존의 조건을 바꾸는 현실이 되었다. 기업들은 앞다투어 탄소 중립(Net Zero) 선언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그 약속이 얼마나 이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최근 런던정경대학 산하 TPI 글로벌 기후전환센터가 발표한 ‘기업 전환 현황 2025’(State of the Corporate Transition 2025) 보고서는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전 세계 시 가총액의 75%, 총 2000개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기후 대응 수준을 평가한 이 보고서는 기업 들의 화려한 탄소중립 약속 뒤에 감춰진 ‘이행 격차(implementation gap)’를 날카롭게 드러 냈다.
보고서가 던지는 첫 번째 메시지는 명확하다. 목표는 원대하지만 실천은 더디다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기업들은 기후변화를 경영에 통합하는 수준(레벨 3)까지는 도달했지만, 구체적인 전환계획과 이행 단계(레벨 5)에 오른 기업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특히 향후 탄소감축 투자계획이나 기술 전략을 수치화해 공개한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해, 선언과 실행 사이의 괴리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두 번째 메시지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장기적으로 2050년까지 1.5℃ 시나리오를 충족하는 기업 비중은 30%로 5년 전의 세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2035년 중기 목표에서는 4분의 3 이상이 기준에 미달했다. 기업들이 탄소 감축을 뒤로 미루는 백로딩(backloading) 현상이 심각하다는 의미다.
탄소예산(Carbon Budget)이 빠르게 소진되는 상황에서, 이런 지연 전략은 결국 더 급격한 감축 압박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산업별 차이도 눈에 띈다. 자동차와 전력 부문은 전기차 전환, 재생에너지 확대 등 상용화된 기술을 활용해 빠른 감축을 실현했다.
그러나 철강·시멘트·석유·가스 부문은 기술 성숙도와 규제 환경의 한계로 여전히 낮은 성과에 머물렀다.
특히 석유·가스 산업에서는 최근 3년간 파리 협정 목표를 충족한 기업이 세 곳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보고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8개 고배출 산업의 56%가 탄소포집·저장 (CCUS) 기술에 의존하고 있지만, 해당 기술 대부분이 아직 실증 단계(TRL 6~7)에 머물러 상용화 가능성에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이다.
항공과 광업 부문은 탄소상쇄 크레딧 구매에 의존 하는 경향도 강해, 향후 가격 리스크와 신뢰성 논란이 불가피해 보인다.
과연 우리는 기업들의 탄소중립 선언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투자자와 정책 당국이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감축 목표가 아니라 그 목표를 실현할 자본투자 계획, 기술 로드맵, 정책 연계 전략이다.
보고서가 강조하듯, 지금 필요한 것은 화려한 넷제로 수사(修辭)가 아니라 이를 실현할 실질적 실행력이다.
앞으로 TPI는 평가 대상을 2,000개에서 1만 개 기업으로 확대하고, 금융·주권 부문까지 포괄 하는 전환평가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는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기후 리스크를 정량적으로 평가하고, 자본의 흐름을 ‘말뿐인 전환’(Transition in Name Only)이 아닌 ‘실질적 전환’으로 이끌 핵심 도구가 될 것이다. 기업의 기후전환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다.
그러나 목표와 실행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그 약속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