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태훈 다함께연구소장] 오늘 오후,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는 미용실로 이발을 하러 갔습니다.
추석 연휴와 일정이 겹치는 바람에 평소보다 조금 늦게 방문하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늘 제 머리를 맡아주던 헤어디자이너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 스타일을 잘 알고 있어서 이번에도 만족스러운 커트를 해주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정리된 후 느껴지는 상쾌함은 언제나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미용실을 나서며 정돈된 머리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저는 문득 어린 시절 이발소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 처음 이발소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발소의 커다란 의자는 어린 저에게 너무 높아서, 나무로 만든 작은 판자를 의자 위에 얹어주셨습니다.
그 위에 앉아 처음 듣는 가위 소리에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는 묘하게 귀를 간질이며 저를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발사 아저씨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가위를 다루며 제 머리를 다듬어 주셨고, 마지막에는 머리를 감겨주셨습니다.
찬물과 뜨거운 물을 섞어 온도를 맞추는 과정에서 가끔 물이 너무 차갑거나 뜨거워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 모든 것이 어린 저에게는 재미있는 경험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당시 이발소에서는 어른들이 머리를 자르고 나면 면도칼로 수염을 정리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면도칼을 사포에 갈아 날을 세우는 모습은 어린 저에게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수염을 면도하던 이발사의 손길은 정교하고 부드러웠습니다. 면도칼이 피부를 스치며 지나갈 때 나는 특유의 소리를 들으며 그 장면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어 수염이 자라기 시작했을 때, 이발소에서 면도를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면도칼이 피부를 스칠때 느껴지던 시원함과 깔끔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발소는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들은 이발소 대신 미용실 을 찾기 시작했고, 저 역시 대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미용실에서 커트를 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발소만을 이용했기 때문에 미용실이라는 공간은 저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자는 이발소, 여자는 미용실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점차 시대가 변하면서 남녀 구분 없이 미용실에서 커트, 파마, 염색 등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지금은 남자들도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 미용실은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공간을 넘어, 사람들의 스타일과 개성을 완성하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같은 미용실을 방문하며 늘 같은 헤어디자이너 에게 머리를 맡기고 있습니다. 그는 제 취향과 스타일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매번 만족스러운 결과를 만들어 줍니다. 물론 가끔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 얼굴형이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커트를 받았을 때의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날에는 거울 을 볼 때마다 속상함이 밀려오고, 다음번 커트를 받을 때까지 그 기분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맞는 미용실과 헤어디자이너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꼈습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같은 미용실을 이용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같은 미용실을 이용했지만, 지금은 각자 다른 곳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아내와 함께 같은 미용실, 같은 헤어디 자이너를 이용하고 있지만, 두 아들은 각각 다른 미용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자신에 게 딱 맞는 미용실을 찾았다며 옮겼고, 작은아들은 담당 헤어디자이너가 다른 곳으로 이직하면서 그를 따라 새로운 미용실로 옮겼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아들들의 커트 비용이 저보다 훨씬 비쌉니다. 저는 1만5000원에 커트를 하지만, 큰아들은 2만5000원, 작은아들은 3만원을 지불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제가 다니는 미용실로 옮기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곳이 아니라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큰아들은 미용실의 분위기와 서비스가 중요하다고 했고, 작은아들은 헤어디자이너와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각자 만족하는 미용실을 찾은 것이니, 더 이상 강요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발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의 선조들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유교적 가치관으로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이라 하여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전통적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수염과 머리카락도 부모에게 받은 몸인데, 그것을 훼손하는 것은 불효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머리카락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신체와 정신의 연결고리로 여겨졌고, 그래서 함부로 자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통적인 긴 머리를 자르고 단발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것을 넘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억압하는 상징적인 조치였습니다.
단발령이 시행되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를 거부하며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일 부는 머리를 자르지 않으려고 숨어 다녔고, 단발을 강요당한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통과 자존심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머리를 자르는 것이 자유롭게 되었지만, 그 때의 단발령은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현대의 미용실은 과거의 이발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요즘 미용실에서는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것뿐만 아니라, 고객들에게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음료를 제공하거나, 헤드스파와 같은 부가 서비스를 추가로 제공하며 고객 만족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또한, 미용실은 단순히 외모를 가꾸는 공간을 넘어, 사람들의 스트레스를 풀고 자신을 돌보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미용실에서 커트를 기다리는 동안 제공되는 커피를 마시며 잠시 여유를 즐기곤 합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행위를 넘어, 현대인들에게 미용실이 중요한 쉼터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발소와 미용실의 변화는 단순히 머리를 자르는 공간의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 그리고 문화의 변화를 반영합니다. 예전에는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고, 수염을 면도하며, 동네 사람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이발소는 단순히 머리를 정리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교차하고 이야기가 오가는 작은 사회였습니다.
그 시절, 동네 미용실에서는 일명 ‘뽀글이 파마’를 한 엄마들이 머리에 수건이나 파마용 모자를 쓰고 미용실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부업을 하던 모습이 흔했습니다.
파마를 한 채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엄마들도 많았습니다. 요즘은 미용실에서 열처리를 하며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집안일을 하거나 집에서 부업을 한다며 파마를 한 상태로 미용실 밖을 활보하곤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 역시 그랬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동네를 돌아다니며 이웃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집으로 돌아와 부업을 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는 길에, 저는 어린 시절 이발소에서의 기억과 현재 미용실에서의 경험을 비교하며 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당시 이발소의 따뜻한 분위기와 정겨운 소리는 사라졌지만, 지금은 나만의 스타일을 찾고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발과 미용은 단순히 외모를 가꾸는 것을 넘어, 우리의 삶과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임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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